한국인 원폭피해자의 역사와 현황
배정민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투하된 원자폭탄은 수많은 인명을 앗아갔다. 총 70만 명의 원폭 희생자 중, 히로시마에서 약 5만 명, 그리고 나가사키에서 약 2만 명의 한국인 원폭 피해자가 발생하였으며, 각각 3만, 1만 명의 한국인이 1945년 말까지 피폭사 하였다. 이렇게 희생된 한국인이 전체 원폭 피해자 중 10%를 차지한다. 재일 원폭 피해자 중 이렇게 한국인의 비율이 높은 것은, 일본의 식민통치로 인한 극심한 생활고를 견디다 못한 많은 한국인들이 살 길을 찾아 일본으로 이주해왔고, 40년대 이후에는 다수의 한국인들이 강제로 징용, 징병이 되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로 끌려왔다가 피폭을 당했기 때문이다.
특히 대부분 빈민층에 속했던 한국인들은 피폭 당시 폭심지 근처의 빈민가에 주로 거주하고 있어 피해정도가 컸다. 게다가 피폭자들을 치료하던 병원에서는 차별했기 때문에 적절한 시기에 치료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병원에서 일본인 원폭 피해자들의 뒷바라지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타 지역에 별다른 연고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계속 피폭지역에 남아있을 수 밖에 없었고, 따라서 더 원폭희생의 정도가 더 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해방 이후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작은 배에 몸을 싣고 한국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불행은 이것으로 멈추지 않았다. 고국으로 돌아온 직후에 일어난 한국전쟁과 원폭후유증에 대해 무지했던 한국인들의 냉담한 태도는 그들에게 더욱 커다란 고통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
한편, 일본에서는 1954년 비키니 수폭실험에 의해 피해를 입은 희생자들에 대한 배상사건을 계기로 원폭 피해자들의 원호운동이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지속적인 운동의 결과로 일본 국내에서는 1957년에 '원자 폭탄 피폭자의 의료에 관한 법률', 1968년에 '원자폭탄 피해자에 대한 특별 조치에 관한 법률'(일명 피폭자 원호법)이 제정되고 일본인 원폭 피해자에 대한 생활 보호·의료 혜택이 제도화되었다.
그러나 1965년에 조인된 한일협정은 전범 국가인 일본으로부터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의 기대를 철저히 저버렸다. 조약과 협정 문서 어느 부분에도 원폭피해자에 대한 보상과 관련 내용은 명시되지 않았으며, 대일보상청구권은 일본이 한국에 제공하는 경제협력기금을 통해 일괄적으로 타결되었다. 이에 크게 실망한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은 1966년에 ‘사단법인 한국 원폭피해자 원호 협회(후에 원호 삭제하여 한국원폭피해자협회로 개칭, 이하 협회)’를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1970년에 있었던 손진두 재판은 한국인들도 피폭자 수첩을 받을 수 있게 한 판례를 남긴 기록적인 승리였다. 7년 여에 거친 재판을 통해 결국 손진두는 피폭자 건강수첩을 교부 받음과 동시에 원폭후유증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곧 일본 후생성이 통달 402호를 내려서 피폭자 수첩 소지인이 일본 영토를 벗어나게 되면 지원을 받을 수 없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한일 양국 원폭 피해자들의 보상요구운동으로 인해 일본정부는 마지못해 1980년부터 한국에 거주하는 원폭 피해자들이 일본에 와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조처하였지만, 그들에게 일본으로 가는 여비는 지급되지 않았다. 2만 명 이상의 피폭자들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업을 통해 치료를 받은 한국인 원폭 피해자는 단 351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 마져도 1986년을 끝으로 종료되어 큰 결실을 보지 못했다.
일본정부로부터의 아무런 원호 조치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국 정부는 1989년부터 미약하게나마 한국 내에서의 원폭피해자 치료제도를 도입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 협회는 일본인 피해자들이 1987년까지 받은 보상금을 기준으로 책정한 23억 달러를 일본 정부에 대해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을 즈음하여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나, 당시 일본은 40억 엔의 인도적 지원금을 제공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이후 곽귀훈이 오사카와 히로시마 고등법원에서 재외피폭자원호법 적용을 위한 재판에서 승소함으로써 2003년 3월부터는 한국인에게도 원호법 적용 수당과 의료지원이 주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재한 원폭피해자의 규모와 상태는 완전히 파악되지 않은 상황이며, 한국원폭피해자 협회에 등록된 회원 2300명 중 800여명은 아직도 원호법의 혜택을 받고 있지 못하고 있다.
협회의 추정에 의하면, 피폭되고서도 살아남은 조선인 3만 명 중 약 2만 3천명이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2004년에 이루어진 국가인권위원회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현재 원폭에 의해 피해를 입은 한국인은 1세 2,300명, 2세 7,500명으로 약 1만 명에 이르고 있다. 조사에 따르면 이들은 일반 한국인들에 비해 건강상태가 열악하고 사회적으로도 매우 소외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1세들에게서는 우울증, 암, 빈혈, 정신분열증 등의 질병 발병비율이 일반인의 수십 배에 이르렀고, 2세들은 동년배 일반인들과 비교하여 빈혈, 우울증, 협심증, 천식 등의 발병비율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현재 피폭자들을 지원하는 시설은 합천의 원폭피해자 복지회관 한 곳 뿐이다. 게다가 1990년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일본정부가 제공한 40억 엔으로 원폭 피해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된 원폭피해자 복지기금 역시 조만간 고갈될 예정이어서 이를 지원할 수 있는 대책 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다.
한편 북한에는 현재 약 2000여명의 원폭 피해자들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보다 자세한 상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북한에 있는 원폭 피해자들의 경우에는 북일간에 관계 정상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보상금의 지급에 대해서 일본정부가 북한정부를 신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 북한의 상황에서 재북 한국인 원폭 피해자들은 큰 어려움에 처해 있다고 보여진다.
한국 원폭피해자 일지 (대구 KYC 히로시마 평화기행 자료집 중에서 인용)
1957년 원폭 의료법 제정 (일본)
1965년 한일협정
1967년 한국원폭피해자협회 결성 – 치료와 배상 요구
1968년 일본 특별 조치법으로 원폭피해자 구제정책
1968년 손귀달(손진두씨의 동생, 당시 35세)씨 치료를 위해 밀항, 강제송환
1971년 손진두씨 밀항, 원폭 피해자임을 증명하는 소송제기
1973년 일본 민간단체인 핵병기금지평화건설 국민회의(핵금회의) 원폭진료서 기증
1974년 일본 후생성 국장 통달(402호)
– 일본 영토밖의 피폭자 지위를 인정할 수 없다
1975년 이남수 씨 ‘내 시체를 일본 대사관에 갖다 놓고 일본의 사죄와 보상을 받을
때까지 한발자국도 옮기지 말라’ 유언을 남기고 사망 (3월)
1978년 소송 후 7년 만에 손진두씨 완전 승소 – 피폭자의 국적과 관계없이 원폭
의료법에 의한 피폭자 수첩을 교부해야 한다는 판결 (일본정부의 책임을 인정)
1979년 일본 자민당, 한국 민주공화당 사이의 한국피폭자에 대한 합의서 교환 (6월)
* 3개 합의 : 한국인 의사의 일본 파견, 일본인 의사의 한국 파견, 재한 피폭자의 도일 치료
1980년 도일치료 한-일 실무자 회의 (10월)
1980년 재한 피폭자 도일치료 실시에 관한 합의서 작성
(치료비는 일본측, 여비는 한국측) (12월)
* 1981 – 1986년까지 도일치료 총 352명
1986년 도일치료 계약기간 만료 (대한적십자사 7개병원과 고신의료원 치료
– 본인부담 10%, 국가부담 90% 상한선 60만원, 피폭자 심사를 위한
진료등록심사위원회 구성 – 대한적십자사, 보건사회부,
한국원폭피해자협회 5인) (10월)
1987년 한국원폭피해자협회 23억불 배상요구 – 일본 변호사 협회지지표명
(일본정부 한일협정으로 일단락)
* 일본인 피폭자 1인당 269/267엔 x 23,000명. 과거 42년간 향후 10년간)
1989년 지정 의료기관 확대 – 서울 경희의료원, 부산보훈병원, 대구영남대부속병원,
마산고려병원, 고령영생병원
일본 후생성 국장 통달 – 일본 영토밖의 피폭자 지위 박탈 (불인정)
1989년부터 1990년까지 한국인 피폭자의 본인부담 10% 요구
(일본인 피폭자와 불평등)
일본정부 4,200만엔 두 차례 지원 (총 8,400만엔 / 424,596,353원)
1989년 11월부터 1991년 11월까지 한국인 원폭피해자 무료진료 실시
치료비 50% 한국정부, 나머지는 일본의 지원금.
연원 16,374명이 치료받음 (피폭 2세도 1세와 같은 혜택)
1990년 노태우 대통령 방일 – 일본정부 40억엔 지원 합의
1991년 1차 분 17억엔 도착 (11월)
1992년 합천의 고려병원 새로 추가 (지정병원 13개소)
(4월) 원폭 2세에 대한 무료 건강진단은 계속하되, 무료진료 혜택은 중단
1993년 2차 지원금 23억엔 도착 (2월)
1998년 (7월 1일) 곽귀훈씨 오사카 지사에게 한국 귀국후에도 건강관리수당을 지급해
줄 것을 요구함
(7월 5일) 한국에 귀국
(7월 23일) 오사카 보건위생부 의료대책과장으로부터 ‘일본국의 영지를 넘어
거주지를 이동한 피폭자에 대해서는 쇼와49 (1974년) 7월 22일부
위발 제 402호 후생성 공중후생국장의 통달에 의해 피폭자원호법의
적용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고 실권으로 취급한다고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출국한 날에 속하는 달의 다음달 분 이후의 건강관리수당의
지급은 할 수 없습니다’라는 회답을 받음
(8월) 건강관리수당 정지 (곽귀훈씨는 6월과 7월 2개월분만 지급받았다)
(10월 1일) 곽귀훈씨 오사카 지방법원에 제소
2001년 (6월 1일) 오사카 지방법원 1심 승소
2003년 (12월 말) 2심 완전 승소, 일본정부 상고 포기
2005년 (1월 19일) 한국인 원폭피해자 이근목 등 40여명 일본정부와 미쯔비시 기업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 1심의 기각 결정을 인정하지 않고 원고
승소 판결
* 소송내용 : 강제연행 – 20년 공소시효가 지났음으로 무효
체불임금 – 한일협정으로 일단락
402호 통달 – 원폭피해자 방치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여 원고 승소 판결
• 한국인 원폭피해자의 역사와 현황 - 배정민 (평화네트워크 번역팀) [한글] [영어]
• 소외와 투쟁의 60년 - 현시내 (평화네트워크 자원활동가) [한글] [영어]
• 한국인 원폭피해자 2세는 누구인가 - 현시내 (평화네트워크 자원활동가) [한글] [영어]
• 한국에도 많은 원폭피해자가 있습니다 - 곽귀훈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회장) [한글] [영어]
• 한국원폭2세환우회는 NPT 국제회의와 미국시민사회에 다음과 같이 국제연대를제안합니다
- 김형율 (한국원폭2세환우회 대표) [한글] [영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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